나의 인문학 칼럼 99

백발공도(白髮公道), 나이 듦을 읊조리다.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본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거울 속에 비친 나이 듦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특히 흰 머리카락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무더위와 태풍이 지나가고 벌써 상달, 10월이다. 이미 가을은 무르익어가고 있다. 아! 가을인가 하면 벌써 겨울이 온다. 이러한 느낌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렇다. 이 무렵 항상 떠 오른 시구가 주희의 7언 절구, 권학문이다. 그중 경구와 미구, “연못가에 돋은 풀들이 봄 꿈에서 깨기도 전에, 섬돌 앞 오동나무 잎 벌써 가을 소리로구나(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세월의 빠름을 얘기하며 학문을 권한다. 六旬의 나이, 아직도 마음은 나이 듦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 이미 머리는 白頭翁이 되어가고 있다.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유심히..

고장 난 인생 수리 중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당시에는 교련복을 입고 조회를 하는데 모든 학년이 운동장에 모였다. 3학년 1반의 학급이 2열 종대로 뒷짐 지고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던 중, 직책 때문에 맨 앞에 홀로 서 있는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천천히 걸어오셨다. 무슨 일인지 자꾸 내 교모를 쳐다보시면서 한 바퀴 돌아서더니 갑자기 제 볼때기를 잡아당기셨다. 그 모든 후배와 동급의 학생들, 더구나 공학이어서 여고생도 있는 앞에서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웃으면서 조용히 ‘아! 선생님’이라고 하는 순간, “뭐, 이놈의 자슥아! 뭐가 고장 났다고? 니가 뭣이 고장 났어? 허허 또 수리까지 한다고야?” 하시면서 웃으시는 듯 약간의 화가 나시는 듯 나중에는 귀를 몇 번 잡아당기셨다. 솔직히 전교생 앞에..

예술가여!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자.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과 창의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예술가들은 그 어떤 권위와 명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만의 시각과 아이디어로 표현해야 하고 또한,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는 경험과 실험적인 창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통해 더욱 풍부하고 혁신적 가치관을 갖는 예술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권위와 명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자신의 목표와 가치관 등을 고려해서 예술을 창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며칠 전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만난 시흥시에서 활동하는 화가 한 분을 만났다. 낯선 분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표정과 행동에서 자유분방함을 보았다. 그를 옭아매는 틀과 고정관념을 과감히 부수고 벗어던지는 듯한 거침없는 예..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無用之用)의 Paradox

시골에는 대부분 동네 한가운데 아님, 다른 한편에 정자나무가 있다. 수령이 오래되어 수피는 울퉁불퉁하고, 올곧지도 못하고 수 없는 세월의 풍파에 가지가 꺾여 있기도 하다. 언뜻 보면 그 정자나무를 베어서 목가구나 집 짓는 대들보로 쓰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렇지만, 한여름에는 동네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유용有用하지 못할지라도 그 유용하지 못함 속 무용無用함으로 그늘과 놀이터가 되는 것에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뜻을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쓸모 있음(有用)’과 ‘쓸모없음(無用)’의 판단 기준이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쓸모 있게 사는가, 쓸모없게 사는가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 장자는 이러한 물음에 『莊子』 「人間世」편에서‘상수리나..

연기법 – 생각하라 그리고 깨달아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며 가족, 회사 그리고 다양한 성격의 집단 속에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그러면서 인맥, 학맥, 혈맥 등의 차이와 갈등에서 오는 불평과 불만을 맞게 되기도 한다. 특히 개인의 사리 판단과 고정불변의 사고로 타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재단하는 경우엔 그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서 심각한 갈등을 초래한다. 누구든 경험했던 일이지만, 실제로 부딪혔을 때는 생각보다 커다란 좌절을 느끼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고통받게 하는 행위는 아상我想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몸과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아상’을 가지고 남과 맞서고 대립하며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진리의 문을 가기 위한 우상(偶像) 타파의 길

https://www.cosmiannews.com/news/251242 [홍영수 칼럼] 진리의 문을 가기 위한 우상(偶像) 타파의 길 - 코스미안뉴스우린 다양한 생각과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친구는 어떤 분을 우상처럼 여기면서, 그 사람의 권위와 전통에 절대적 믿음을 갖고www.cosmiannews.com 우린 다양한 생각과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친구는 어떤 분을 우상처럼 여기면서, 그 사람의 권위와 전통에 절대적 믿음을 갖고 의지하며, 그 어떤 비판과 거부감 없이 그야말로 맹목적으로 맹신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자기만의 주체적 사상과 이론도 없이 무조건 추앙하는 그..

반대의 일치(反對-一致), 그 진리의 터득함.

곡즉전曲則全, “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온전 하려면, 구부려지거나 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냇가의 버드나무를 보자. 바람이 불면 휘어진다. 태풍이 불어오면 더욱 휘어진다. 휘고 굽지 않으면 결국 가지가 끊어지거나 아니면,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이것은 유연한 사고와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휨’이 곧 ‘폄’이고, ‘폄’이 곧 ‘휨’이다. ‘곧음’이 ‘굽음’이고 ‘굽음’이 ‘곧음’이다.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상생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처럼 ‘반대의 일치(反對-一致’라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 삶의 현실이다. 어느 한 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라는 생각으로 의연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을 오직 자기의 시선으로 ..

누군가의 세상 속에서 ‘나’를 발견하자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때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분별하고 가치를 지향한다. 특히 창의력에 목숨을 건 문학,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관찰과 주의 깊은 시선이 필요하다. 그 어떤 예술 분야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보다는,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움직이는 현장성과 현실감에서 보고 느낄 때 시와 음악이 흐르고 그림이 보인다. 온통 세속적인 욕망과 욕심으로 가득 찬 이기적 사고에는 좋은 작품이 뿌리내릴 수 없다. 건설 현장 막일꾼의 옷에 적신 땀과 하얗게 맺힌 작업복의 소금기 배인 몸과 옷에서는 시와 서사가 흐르지만, 직접 부딪치지 않고 오직 지시만 하면서 작업의 성과만을 위해 욕심과 욕망으로 업적을 이루려는 그러한 사람에게는 결코 시도 서사도 없다. 서사와 시를 만나려..

창조, 자기만의 텍스트를 만들자.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며 동네 앞 저수지에서 자주 멱감았다. 그 저수지는 여러 산골짜기와 시냇물이 모여들어 다양한 어류와 수생식물들을 키우면서 아랫녘 벌판 농작물의 생명과 같은 물을 공급한다. 그렇게 사방에서 흘러들어와 모인 곳인 저수지는 뭇 생명들의 종합 영양제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 또한 다양하고, 새롭고 창의적인 저수지에서 지식과 정보를 흡입하고 섭취해서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층층 적 다랑이논이 아닌, 오직 한 골짜기에서 흐르는 똑같은 물처럼 단순한 지식과 정보가 아닌, 말 그대로 여러 골짜기 물들이 고인 저수지처럼 많은 식물과 농작물, 어류 등에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고 키우듯 다양한 텍스트의 고리와 네트워크에서 관련성을 찾아 새로움을 발견하는 창조적 사고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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