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99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반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상대를 배척, 폄하, 격퇴 시키려고 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이렇게 서로 밀어내며 관계하지 않으려는 가치 전도에서 우린 과연 그 어떤 타협과 협치를 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당쟁과 사화士禍를 보면 삼족을 멸하고, 유배 보내고 숱한 백성들은 피로 물들고 피폐해져 갔다. 동인은 서인을, 서인은 남인을 죽이면서 대북, 소북 등의 끊임없는 살육이 자행되었다. 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귀양, 유배 보냈다. 오죽했으면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고 했겠는가. 이러한 일이 왕권과 관계를 맺었기에 일어났다고 할 때, 과연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면 괜찮다는 것인가? 특히 사회적 지위에 있고 지..

드뷔시 ‘달빛’,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염천의 8월,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감정 변화가 심한 뫼르소가 아니어도 뜨거운 햇볕에서는 이유 없이 격한 감정이 생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는가 보다. 9월이 왔다. 조석으로는 다소 시원한 느낌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중추가절, 추석 하면 보름달이 떠오른다. 땡볕이 아닌 달빛은 박목월의 시처럼 구름과 달빛에 취해 걷는 강나루 길, 그 얼마나 정겨웁고 낭만적인가. 10여 년 전 늦가을, 경북 양동마을 초가집에서 하룻밤 묵었다. 바뀐 잠자리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뒤척거리는데, 어느새 달빛이 슬그머니 창호 문 틈새를 비집고 윗목의 머리맡에 누워 있었다. 낭월朗月의 은빛 가루가 서걱서걱 부서져 내리니, 낯선 이방인인 여행객의 심사는 가히 천지 공간에서 외로움의 깊이를 잴 수 있었겠는가...

생각을 울리자, 한울림의 종소리처럼

어렸을 적, 자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자랐다. 그리고 초, 중학교 때까지 면 소재지와 읍내로 통학했었다. 그 시절, 지금까지 유난히 기억에 남아 언뜻언뜻 떠올려지는 것이 있다. 밤 12시 되면 높은 뒷산 너머의 읍내에서 통행금지의 사이렌 소리가 고적한 산골 동네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새벽이면 닭의 홰치는 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동네 앞 커다란 저수지 건너편에서 산사의 종소리와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사이렌 소리는 누군가 한 잔 술에 취해 마구 큰소리로 고함지르듯 하고, 그래서인지 정감도 없을뿐더러 신화 속 매혹적인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냉정함의 기호로 들렸다. 그것은 과학 문명을 이용한, 더구나 통행금지라는 동동걸음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교회당 종소리는 초등학교 때 익숙하게..

내 귀는 밭의 귀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자연은 참 오묘함과 심오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특히, 무심코 눈동자에 맺히거나 문득 고개 들었을 때 우연히 다가오는 풍경이 그러하다. 휴가를 맞아 땅끝 고향에 갔다. 낫과 삽을 가지고 밭에 나가 참깨도 수확하고 잡풀을 베는데 햇볕이 너무 따가웠다. 잠시 그늘에 쉬는데, 여러 마리의 곤충이 팔다리를 오르내리며 울기도 하고 뒤편 숲에서는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대자연의 가장 원초적인 음악으로 들려오고, 상상의 생각들이 뭉텡이로 다가오니 달콤하고 풍부한 휴식일 뿐이다. 너무 더운 날씨에 또, 다시 삽질, 낫질을 멈추고 밭두렁 나무 그늘에 앉았는데 힘찬 날갯짓의 노랑나비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나비 때문이었을까?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아닌, 예전에 봤던 이라는 영화가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영..

없는가?, 향가와 속요와 시조가 흐르는 곳은

시나 음악 등의 예술 작품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진정성 있게 솟아오르는 샘물일 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생명수 같은 샘물이 마르거나 증발해 버린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시다운 시와 음악다운 음악, 진정성 있는 예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이다. 이른 아침을 먹고 출근해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수없는 장소와 매체를 통해 정작 본인과는 상관없이 눈과 귀, 한마디로 소음공해 속에서 오감은 피곤하다. 이와 같은 생활패턴에서 서정적인 정서나 낭만적인 꿈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한지 모른다. 이러한 도돌이표 같은 생활을 카뮈는 ‘시지포스의 신화’ 속 그 형벌을 통해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상성을 헤쳐 나가는 길은..

나혜석, 금지된 것을 금지하다.

사실 예술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였다. 여성은 그림의 모델이나 문학작품 속 비련의 주인공 아님, 음악적 영감을 안겨주는 존재였기에 예술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프로이트의 주장을 보면 남성보다 여성은 수동적이고 주변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는가 하면 이러한 논리에 반대하는 라캉은 생물학적인 콤플렉스가 남녀 차별을 가져온 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편견과 독단에 의한 폭력적 야만적 때문이라고 했다. 여성 해방론을 들고나온 미술은, 예를 들어 바바라 크루거와 신디 셔먼 등은 그림으로 표현한 1980년대를 대표적 화가들이다. 여성문제가 폭력적인 대중매체에 훼손당한 여성의 분노를 충격적인 그림으로 담아낸다. 이들보다 다소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또한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

詩적인 삶을 위해 리듬을 갖자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특별한 활동, 자기만의 리듬을 갖고 살아간다. 그 활동이나 리듬이라는 게 취미활동, 또는 추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등산, 낚시, 여행, 독서 등 수많은 분야가 있다. 이렇듯 정해진 테두리, 즉 회사나, 집 등의 고정된 카테고리를 벗어나 자기만의 휴식과 에너지 충전, 더욱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유가 바로 삶의 리듬을 갖는 게 아닐까. 삶의 리듬을 위해서는 틀에 박힌 일상을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타성에 젖은 네모 상자를 깨뜨려야 한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매일매일 억눌리고 틀에 박힌 삶에서 탈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나 음악처럼 운율이 있는 리듬감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기 위해서는 나를 감싸고 있는 고정된 그물을 찢고..

미음완보微吟緩步, 사색의 숲길을 거닐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고 했다. 자연 속에서 물리적으로는 갈대처럼 한없이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모든 걸 수용하고 포옹할 수 있는 실존적 인간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은 태풍이든 미풍이든 이리저리 휩쓸리고 눕다가 일어서고 일어섰다가 다시 눕고 나부끼면서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출근하고 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매일 반복 되는 시계추 같은 삶, 이렇게 패턴화된 기계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다. 또한, 생각과 사색 속에 자신을 관조하기보다는 손에 쥔 핸드폰이나 컴퓨터 등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

몸은 진실하다

어느 날 지인과의 만남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몸은 진실하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체험’을 했다. “직접 몸으로 체득하는 체험적 요소에서 우러나온 글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얘기 중에 나온 말이었던 것 같다. 특히 필자는 책을 읽는 도중에 무릎이나 머리를 가볍게 치면서 ‘아~하’라고 나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뱉을 때가 가끔 있다. 참고로 이 글에서의 ‘몸’은 ‘육체, 신체’를 뜻한다. 인간은 노동을 한다. ‘호모 라보란스다 (Homo laborans)’다. 이 말은 삶을 위해 일하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근본이고 그러한 육체적 노동의 행위는 그 어떤 종류의 노동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몸을 활용한 노동 즉, 농사짓는 일이나 건설 현장, 공사장 등에서의 노동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며 신성하..

비움, 그 장엄한 희열

장자 철학의 핵심은 ‘비움(虛)’이라 할 수 있다. ‘심재心齋’란 실재처럼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심재를 통해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비움’이다. 심재를 실천하게 되면 일상적인 의식 속의 작은 나(self), 즉 小我는 사라지고 새로운 커다란 나(self) 즉, 大我로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왜냐면, 가족과 더 나아가 직장,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온통 비우고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심재를 하게 되면 텅 빈 방에 빛이 뿜어진다는 것이다(虛室生白).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면 왜곡된 세계가 보이지 않고, 자기만의 관점으로 보는 세계관도 없어질 것이다. 장자의 수양법인 심재좌망(心齋坐忘), 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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