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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걷다가/황상희

산길을 걷다가 울퉁불퉁 드러난 벚나무 뿌리를 본다 가장 아픈 기억의 흔적처럼 드러난 상처 다발로 송두리째 뻗어 있다 그래도 땅속에서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땅과 하늘의 경계에서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당당히 서 있는 벚나무 마지막 기운이 다할 때도 저렇게 자기를 버티고 서 있는 나무 죽음을 앞에 두고도 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 잠시 신발을 벗어놓고 나갔다 돌아온 주인처럼 해마다 새싹이 돋아 넉넉하게 그늘을 품어주던 나무 시집 「귀의 말」, 시산맥사, 2018. -------------------------------------- 문학은 정서와 감정에 바탕을 둔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도대로 익혀야 하는 ‘의도적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독자의 멋대로 해석하는 ‘..

나의 시 평론 2023.02.10

시인이여!/홍영수

명예를 버리고 권력을 취하지 마라. 시의 언어로 불의를 꾸짖고 시적인 영혼으로 정의를 울부짖어라 세상의 눈이 이해하지 못하고 가없는 비난이 쏟아져도 늠연히 맞서서 만세의 목탁이 되고 길잃은 양을 인도하는 축복의 사제가 되어라 강한 자의 곁에 서지 말고 약한 자와 함께 걷는 시인이 되어라. 총칼 끝에 죽음의 그림자가 매달리고 시인의 혼이 찢기며 쫓기어도 그대여! 맨발 맨손으로 뛰어나가 가슴을 열고 뜨겁게 껴안아라. 부정과 악의 고통에 시달린 자에게 한 줌 햇살을 건네주고 그리하여, 자유의 광장엔 억압과 절망을 넘어선 환희와 희망의 촛불을 켜라.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

나의 시 2023.02.07

봄이 오는 소리/홍영수

가랑비 온 누리에 초록빛 물들이고 눈엽은 풋내 청청 꽃술은 향내 얼얼 널 위해 이는 내 마음 꽃보라로 휘날린다. 비꽃은 해토머리 여울물 일깨우고 실버들 물관부에 든바람 불어오니 쪽잠 든 늦겨울 뜨락 날빛으로 빛난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나의 시 2023.02.03

꿈의 퍼즐/홍명근

살다 보니 열망과 갈등의 순간 위에 오래 머물고 머물러보니 기다림은 시곗바늘을 흔든다. 초침 따라 달려가던 시절에는 별 하나 꽃 한 송이조차 두근거렸다 이제는 꽃이 피어도 별이 반짝여도 설레임 희미하지만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겹쳐 만난 인연은 실타래처럼 길다. 실매듭을 풀어 나무가 기둥처럼 자라는 언덕에 둥지를 틀고 학이 되어 바라보는 길 끝에 담쟁이 넝쿨 한 겹 더 두른 너는 또 하나의 울타리. 살아가는 것이 순간이 쌓여 가는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깊어져 가면 길이 되는 것일까 별 모양의 담쟁이 잎 넝쿨 너머 꽃 같은 저 무지개는 열정을 향해 여전히 손짓하고 있다. 시집 『꿈의 퍼즐』, 미디어 저널, 2019. 그렇다. 느리게 움직이는 시침, 분침보다는 1초라는 짧은 순간을 소리 내며 똑딱이는 모습은..

나의 시 평론 2023.02.03

관곡지에서 만난 잭슨 폴록

어느 해 늦가을, 우리나라 최초의 蓮 시배지인 시흥시의 관곡지에 갔다. 하늘대는 연잎과 연꽃향은 초겨울로 접어들면서 이미 생명을 다했다. 오히려 이러한 풍경에 시선이 더 쏠리면서 많은 걸 생각게 한다. 필자는 오색단풍이 찬연한 풍경보다는 가을이 끝날 무렵 11월 중순쯤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저물어가고, 사그라지며 무너져가는 절정의 뒤안길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절정의 본질이 남겨 놓은 흔적을 더듬어 찾기 위해서이다. 홀로 서서 늦가을의 연지를 바라보는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잭슨 폴록이 떠 올랐다. 그 이유는, 한여름 연지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연잎과 연잎을 키워 올리는 연대, 연꽃의 향기 등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의 정절이 남긴 흔적, 말라비틀어진 연잎은 바닥에 엎드려 있..

엄마가 치매야/이재학

18 치매로 정신이 없어도 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여-전-히 밤을 지키며 아들을 기다리는 울 엄마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기억력이 쇠퇴해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뚜렷했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더구나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지난 일들은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좋지 않은 감정의 강렬한 흔적이나 뇌 속에 간직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는다. 그래서 망각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난 일의 개인적 경험이나 특히 부정적인 경험이 머릿속에 남겨져 있는 이러한 기억의 흔적을 생리학에서는 엔그램(engram)이라 한다. 한 마디로 ‘기억의 세포’, 또는 ‘기억의 흔적’이다. 시인의 어머니는 흔히 우리가 일컫는 노인성 질환의 대표 격인‘치매’증상이 있으시다. 치매의 질..

나의 시 평론 2023.01.27

절절한 사랑의 공감체험―팰리스 곤잘레스-토레스

형형색색의 빛으로 불을 밝히는 저녁이다. 하늘을 치솟는 거대한 마천루의 위엄 앞에 짓눌린 사람들, 그들의 영혼은 넝마처럼 찢기고 흩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그 이름의 문명 앞에 맥없이 걷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희망을 잃고 길을 잃은 듯 방황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러한 서울의 중심인 명동 중앙우체국 옆의 빌딩들 사이에 옥외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침대나 이불광고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문구나 이름이 없다. 새로 출시된 상품이라면 회사의 이름이 그리고 광고의 카피가 있을 텐데 없었다. 침대 사진에는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베개 두 개가 놓여있고 누군지 모른 두 사람이 함께 누웠다가 방금 일어난 흔적으로 걸려있었다. 이 작품은 다름이 아닌 쿠바 태생의 미국 현대 미술가 ‘팰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섬이 되다/홍영수

젊음의 언어는 산 너머로 외출해서 메아리 되어 돌아오지 않고 나이 듦의 말言은 강가에서 넋두리하며 홀로 앉아 소리 없는 곡을 하니 말과 말의 물길이 메말라 경계가 두터워진다. 오감五感은 오감 없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소통은 고개 숙여 땅 밑으로 스며든다. 이웃의 눈빛은 무관심의 담장에 가로막혀 초점을 잃고 따스한 정의 손길이 없는 삶의 터전엔 냉정만이 죽은 대화를 위해 묵념을 한다. 네가 곁에 있고 내가 옆에 서서 마주 바라보는 식탁과 광장에도 쓸쓸함이 쓸쓸하게 흘러내리고 외로움은 냉혈의 옷깃을 여민다. 손과 손을 붙잡지 않고 눈과 눈이 멀어지며 섬이 되어간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나의 시 2023.01.21

운필運筆/박용섭

가뭄이 길었던 해 아버지 가슴도 논바닥처럼 타고 있었다 비단실 같은 빗줄기 촉촉하니 쟁기를 지고 멍에 메워 큰 소를 앞세우고 논으로 가신다 쉬는 시간이 되면 농주 한 사발 소에게 먼저 권하며 힘들지 해 그림자에 비치는 논고랑은 예서체를 펼쳐놓은 것 같다 모를 심는 것은 내 몫이 아닌 것을 눈물이라도 찔끔 고이면 행서체로 내가 써레질해야지. 시집 『내 책상에는 옹이가 많다』, 산과들, 2018. 한 가뭄에 타는 논바닥, 갈라 터지고 흙먼지 일으키는 논밭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무너지는 것이다. 엷은 홑바지를 입은 아버지와 헐렁한 몸빼를 입은 어머니가 일구는 농사철, 알바도, 시간제 근무도 없었던 시절엔 곡식 한 알, 채소 한 포기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예전에 산골 다랑..

나의 시 평론 2023.01.17

사랑의 감정/홍영수

도심 속 카페에서 홀로 앉아 차를 마실 때가 있다. 눈 들어 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그들을 무심코 바라볼 때가 있다. 그냥 스치는 풍경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예전 이성의 친구를 보는 듯하고 또는, 평소 바랬던 이상형이 눈에 확 들어올 때도 있다. 이처럼 샤를 보들레르에게는 도심 속 군중의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시가 있다. 『악의 꽃』 중에 「지나가는 여인에게」 의 시다. 시의 일부를 보자. (上略) “날렵하고 의젓하게, 조각 같은 그 다리로, 나는 마셨다, 실성한 사람처럼 몸을 떨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의 눈에서, 마음 녹이는 달콤함, 뇌쇄적인 쾌락을.” (下略) “실성한 사람처럼 몸을 떨며”,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등을 보면 도시의 인파 속에서 스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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