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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울/양정동

물거울/양정동 실바람이 간간히 스쳐가는 연못 위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간다. 소나무 가지를 타고 참새가 연못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내 얼굴을 호수가 보고 있어 내 마음도 보려고 손 컵으로 물을 뜨니 찡그린 표정으로 조용히 두고 보라 한다. 마음은 조용히 보는 것이라고. ------------------------------------- 조용한 연못을 스치는 실바람 소리에서도 작곡가는 시의 리듬을 들을 수 있고, 파란 하늘에 둥실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고 한 줄의 시를 띄울 수 있고,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세속적인 합창 교향곡의‘종’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복음을 생각하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거울처럼 맑은 연못, 바로 옆 소나무 가지를 오락가락하며 뛰어노는 참새 떼가 물속에 투영..

나의 시 평론 2022.12.27

정한수/홍영수

새벽을 타고 문지방을 넘는다. 행여 들키면 안 되는 듯 잠든 문고리를 잡고 정지문을 연다. 부뚜막 곁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어둑새벽의 이슬을 밟고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다. 고요한 뒤란의 장독대 위에 신줏단지 모시듯 흰 대접 하나 올려놓는다. 새벽길 떠난 남편보다 먼저 길 열고 부정을 털어버리려는 듯 옷매무새 다잡으며 두 손 모은다. 버리고 비워서 헐렁해진 몸 허리 굽혀 천지신명께 빌고 허리 펴며 하늘과 소통하며 목젖에 걸린 자식들 위해 여자라는 것조차 잊는다. 아니, 처음부터 어머니였을까. 소리 없는 큰 울림의 기도 한 그릇 성역이고 종교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

나의 시 2022.12.24

경계境界/김경식

수덕사修德寺 가는 길 난데없는 겨울 소나기라니, 일주문에 서서 비를 긋는다 산중엔 따로 울을 두르지 않느니 문안의 비와 문 밖의 비가 다르지 않아 바람은 빗물 따라 산을 내려가고 어둔 귀 하나 문설주에 기대어 저녁 법고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집『적막한 말』 ------------------------------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갈 때 첫 번째 세워진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가람에 문은 문짝이 없다. 문은 공간 분할만하고 상징적일 뿐이다. 그리고 주변엔 울(담장)도 없다. 산중 사찰은 대부분 개방적이다. 불교는 오고 감에 자유자재 한다. 부처님을 여래라고 부르는 것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속세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한 마음으로 통하는 진리의 세계로 향하..

나의 시 평론 2022.12.24

마음의 무게/임내영

몸이 아프면 솔직해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욕심이 생겨 악다구니로 버텼는가 싶다가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해 나중에 전부 포기하게 되고 그 다음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죽지 못해 모든 걸 내려놓기보다는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면 아플 때 무게가 줄어들겠지 걱정 한 줌 꽃씨처럼 날려 버린다 시집 -------------------------------- 千尺絲綸直下垂 천척 사륜직 하수 一波纔動萬波隨 일파 재동 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 한어 불식 滿船空載月明歸 만선 공재 월명 귀 천 길 물 밑에 낚시 줄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렁이자 만 물결이 따라 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물고기는 물지 않고 빈 배에 달빛 가득 싣고 돌아오네. -冶父道川 禪師- --------------------------..

나의 시 평론 2022.12.24

기다림과 떠남의 변주곡, 황진이와 슈베르트

문학과 예술은 아주 매혹적이다. 그 이유는 일상적인 삶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과 예술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사고와 감수성, 선지식보다는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문학의 깊이와 예술적 가치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에서 마시는 한 잔의 감흥과 어디서 들려오는 한 모금의 음악, 그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가. 이처럼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게 문학과 음악이다. 새소리와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적 요소로 다가오듯, 문학 또한 그러한 소리 너머의 보이지도 들을 수도 없는 것에서 시인은 시혼을 일깨우고 프시케의 외침이 들린다. 이 엄동설한에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과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서 뮤즈를 ..

달항아리/홍영수

갓맑은 도공이 아첨도 뽐냄도 없이 손품으로 빚으며 여백이 다칠세라 가다듬은 호흡이다. 가만히 불러도 수줍어 대답 못하는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 겉치레 없고 후더분한 종갓집 큰 며느리다. 위아래 한 몸 되기 위해 장작의 불잉걸에서 열꽃으로 핀 둥그스름한 불이不二의 법열경 손이 아닌 자연의 결로 연주한 물레와 흙의 협화음이다. 일그러진 듯, 뒤뚱거린 계산 없는 분방한 자유 알음은 없지만, 영혼의 앓음으로 지은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도공의 순백한 정성 한 덩이다. 기교와 멋을 버린 생략의 미 다듬지도 않고 무심한 여유에서 쓴 시작도 끝도 없는 뽀얀 문장 마음으로 읽고 심장으로 감동하는 비문의 둥근 아름다움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

나의 시 2022.12.16

오늘 하루 십리다/홍영수

‘오늘 하루 십리다’ 길옆 식당 유리창에 붙여놓은 글이다. 하루‘쉽니다’의 날인데‘십리다’이다. 하루하루가 십리 길을 걷는 삶이기에 그 길의 압박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흰 종이 한 장에 써 놓았다 비단, 오늘뿐만 아니었기에 주인의 맘을 헤아리는 계산대의 볼펜이 스스로, 아니 저절로 쓴 것이다. 어찌, 십 리 길처럼 걷는 쉼이 쉼이겠는가 같은 듯 다른 듯, 다른 듯 같은 듯 ‘십리다가 쉽니다’이고 ‘쉽니다가 십리다’이다. 불이不二의 삶을 헤아리는 주인은 ‘오늘 하루 십리다’라고 써 놓고 ‘오늘 하루 쉽리다’라고 읽고 싶은 것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

나의 시 2022.12.16

진주珍珠의 이력서/홍영수

두 입술을 닫는다 썰물 때 불어오는 뭍의 바람결도 밀려오는 밀물 때의 바닷물 어루만짐에도 입술은 닫고 있어야 한다. 갯바닥에 나뒹굴며 도道 한알 키우기 위해 층층의 세월로 쌓은 조개의 등딱지는 물의 고랑과 이랑으로 단단히 주름져가야 한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키우기 위해 또 다른 세계를 내 안에 품기 위해 해신들의 기도 소리에도 개펄을 뒤집어 놓은 개울음에도 껍질은 벌릴 수 없고 흡반을 내밀 수 없다. 앙다문 외투막도 열지 않고 몸속에 품은 짜디짠 눈물을 삼키며 몇천 번 죽살이의 물굽이를 돌아 나온다. 지진과 해일을 데려온 포세이돈을 만나도 갯바닥에 박히고 뒹굴지언정 함부로 인사를 할 수 없는 숙명 은밀한 방에서 키워내는 하나의 세상 그의 이력은 동글반짝하다. ----------------------..

나의 시 2022.12.13

동백꽃/홍영수

핏빛 한 웅큼 툭 떨어진다. 심장 덩어리 하나 서녘 노을에 짙게 물들며 때가 되어 지구 위로 낙하하는 저 숭고한 찰나의 긴 별리. ‘동백꽃’의 꽃말을 열정적 사랑(붉은 동백) 혹은 비밀스런 사랑(흰 동백)이라 하는데 그보다는 ‘깨끗한 죽음’이란 의미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다른 꽃과 달리 ‘동백꽃’은 꽃봉오리 채로 어느 순간 툭하고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꽃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그 흔적도 찾기 힘들다. 멀쩡하게 잘 피어 있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져버리는 동백 — 그래서 노인들 방에 ‘동백꽃’ 화분을 두지 말라고 한다. 동백꽃이 질 때, 바로 꽃봉오리 통째로 어느 순간 툭 떨어질 때 노인네들은 가슴까지 철렁 내려앉는단다. 홍영수의 시 에는 ‘동백꽃’의 그런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

나의 시 2022.12.10

종로에 핀 녹두꽃*/홍영수

바람이 분다 하늘에서 인간에게 불어온다. 종로 네거리 상투 머리가 영혼이 흔들린 고부 농민에게 목청껏 울부짖으며 죽창과 농기구 들고 올라오란다 전옥서(典獄署)의 컴컴한 적굴에서 교수형으로 쏟았던 붉은 피로 동학의 바람을 휘어잡고 깊게 새겨야 할 역사의 서사를 종로 바닥에 일필휘지로 쓰며 서 있는 지금의 자리를 똑바로 보란다. 서울 한복판, 저 부릅뜬 두 눈은 탐욕의 부피를 부러워하지 말고 허상의 명예를 의심하라 하면서 비록 기울어진 운동장일지언정 우금치의 말발굽 소리로 일깨우란다. 함성의 바람이 분다 황토현 갑오의 바람으로 분다 주절주절 내리는 을미의 봄비에 사라지면서도 피어난 녹두 꽃잎 하늘하늘 길 위에 휘날린다. *종로 4거리에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

나의 시 20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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