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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마을

꽃잠을 위해 벗어 놓은 새색시 치맛자락 같은 고운 해안가 안으로 굽은 선창가에서 비릿한 해풍을 담은 고무대야의 간재미가 벙긋벙긋하며 사자봉을 삼키고 있다. 오가는 여객선 뱃고동 소리에 잠든 전복이 깨어나 다시마로 입맛을 다시고 갈매기의 파닥거린 날갯짓에 깜짝 놀라 튀어 오른 물고기들의 시선들이 바닷가 솔방울의 짭조름한 눈짓과 마주할 때 뻘낙지는 수족관 유리 벽에 붙어 나그네의 발걸음을 빨아들인다. 동무 삼은 시린 파도의 속삭임과 바닷가 서어나무 고목에 옹이진 세월로 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한 갈두리(葛頭里)* 까치놀 한 모금 머금고 진한 보랏빛 칡꽃 향에 함뿍 젖은 칡 머리. *갈두리(葛頭里): 땅끝 마을의 지명. 일명, 칡 머리 ------------------------------------ 홍영수 시인..

나의 시 2023.03.31

도시 풍경

한겨울의 강물처럼 시린 얼굴들이 도심을 흐르고 있다 물고기는 무리 지어 이웃을 하고 새들은 떼를 지어 길을 찾는데 북적대며 걷는 저들의 표정엔 말 이음표 하나 없고 휘청 걸음에 말줄임표만 실려 있다. 카페의 유리창 밖 바람이 바람에 실려 날고 비가 비를 맞고 있는 풍경들 사이로 조울증 걸린 모습들이 내일을 잃어버린 듯 외롭게 외로움을 타고 있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소통이 없어서이다. 그곳이 언어의 사막이다. 안개는 안갯속에서 피어오르고 눈은 눈 위에 쌓이듯 언어는 언어끼리 소통해야 하는데 회색빛 언어의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

나의 시 2023.03.29

우리의 소리, 恨 속의 興

필자의 고향이 남도 지역이어서 판소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어떤 공연이나 특히 회갑연 때는 남도 잡가나 판소리 단가 등을 많이 듣게 되는데, 옆지기 또한, 판소리를 취미 삼아 활동하기에 함께 공연 다니기도 한다. 판소리 기원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마을에서 큰 굿을 하면서 벌이는 판놀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또한 이러한 놀이 형태에서 소리 광대가 소리와 만담, 재담, 몸짓 등을 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시대는 조선 전기에도 불렸을 것으로 보는데 자료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이 남아있는 조선 영조 시대부터 봐야 할 것이다. 판소리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어 왔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의 구례, 순창 등에서 불리는 동편제는 웅장하고 ..

알베르토 자코메티

알베르토 자코메티 -고요의 울림과 고독의 전율을 창조하다 미술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니 의아심을 가진 분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학구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어쩌다 이런저런 잡문에 가까운 글을 써 왔던 나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또한 일천한 실력으로 시심도 시력도 없이 글쟁이의 최 하단 말석에 앉아 시답지 않은 시를 써온, 군에 갓 입대한 훈련병 같은 시졸(詩卒)이니 말이다. 어느 해 시골에서 만난 천문학을 전공한 후배와 유난히 맑고 밝은 가을 밤하늘을 쳐다보며 평상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달과 별 등을 볼 때 왜 빛이 나고 지구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고 왜 별똥별이 떨어지는 등의 이유를 알고 보느냐고 물었다. 참 이상하다. 내가 가을밤의 하늘을 보면서 윤동주의 ‘서시’를 떠 올리며..

나의 雜論直說 2023.03.19

시의 입술에 소리의 색을 바르다.

문학과 음악, 그 어떤 예술이든 우리의 삶과 뗄 수 없는 연결고리로 얽혀 있다. 숲속의 새들과 들녘의 농작물과 흐르는 시냇물, 경로당의 어르신들과 유치원의 어린이 등은 결코 누구에게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현실 속에서 함께 느끼는 감정과 정서 등이 부딪치면서 때론, 공감하고 공유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 낭송 또한 시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 가슴에 와닿은 그 무엇 속에서 자기만의 느끼는 감정과 감성으로 낭송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낭송할 시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감상하려면 말러의 시를 읽어야 하고, 판소리를 이해하려면 민초들의 굴곡진 삶의 애환과 고뇌와 통증 등에 공감해야 한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시의 정신세계에 들어가서..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홍영수

어느 석공의 혼의 흔적일까 얼로서 쪼아 다듬어 곧추선 암벽에 벋지르고서 하고픈 말 하마 미소로 던지는 것일까. 뒤 울리는 바람살에도 일천오백의 귀를 열어 서해 개펄의 조갯살 찌우는 소리 들으며 다소곳한 수인手印과 자비의 입시울로 바위인 듯 바위처럼 서 있는 백제의 혼 사위어가는 세월 속 해와 달빛에 젖어 한 움큼의 은은한 미소로 창공을 이고 중생을 바라보는 침묵의 미소,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깊을까.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나의 시 2023.03.11

폐지 줍는 할머니/홍영수

등 굽은 할머니 손에 끌려가는 손수레 갈지자로 뒤뚱거린다. 구르는 바큇살에 헐렁한 허리춤도 덩달아 허름하게 함께 굴러간다. 짐칸에 실린 종이상자와 페트병 몇 개 고물상을 다녀온 뒤 손에 쥔 몇 닢 저녁 밥상의 물 한 모금에 얹혀 마른 목구멍으로 겨우 넘어간다. 걸어왔던 길이 굽은 길이었듯 구불구불한 차량 사이를 줄타기하며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든 生, 한 끼의 밥 톨 앞에 위험한 곡예는 삶의 저당일 뿐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나의 시 202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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