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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처음 내게, 보령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 먼 길을 달려와 마주한 보령 바다는 한 자락의 푸른 옷깃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파도가 섬 한 채를 풀었다가 조였다가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수평선은 한 줄의 단호한 문장으로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읽어 낼 수 없는 바다의 안부 말수 적은 아버지 같았다 어둑한 저녁의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와 구석진 마당가에 빈 지게로 우두커니 서서 발 디딜 곳 없는 어둠을 부려 놓곤 했었다 어스름한 저녁의 수평선은 고단한 생의 시작과 끝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할 말들을 알아챈 건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아버지의 삶도 저토록 붉고 찬란하게 타오르고 싶었을까. 다시 잿빛으로 타다 남은 검붉은 밑불로 남아 세상의 바닥을 단 한 ..

죽음, 그 너머의…

인간은 태어나 자신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가 죽는다. 그 과정은 신체적인 조건과 기능, 장기 역할의 노후로 인한 생로병사(生老病死)일 수도 있고, 또한 예상치 못하고 갑작스러운 사고에 의해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필연적으로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적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지위고하, 빈부격차,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과는 전혀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닥쳐오는 절대적인 운명이다. 다만, 언제 어느 순간에 찾아올지 모르는, 라나(k. Rahner)의 말처럼 “어두운 운명이요, 밤에 찾아오는 도둑”이라고 했듯이 어찌 보면, 인간이라는 생물체의 탄생 이후에 죽음에 대한 사유는 생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예술적 철학적 사유가 아닌가 한다. 서양은 죽음을 ..

사물놀이

흥이 흥을 타고 소리가 소리를 타고 긴박하다 늘어지고 늘어지다 긴박해지는 가락의 멋, 소리의 맛. 사물(四物)은 우주 안에 우주는 가락의 품에 음이 조이면 양이 풀고 양이 풀면 음이 조이면서 땅의 색으로 하늘의 빛깔로 어우러져 진동하는 백의(白衣)의 장단. 흐르고 흐르다 넓어지다 깊어지고 구르다 합쳐지고 합쳐졌다 다시 구르면서 혼이 혼에 실려 한 울림으로 감기며 삶의 음표와 하늘의 음표가 만난 공명의 화음. 지 잉 징징 바람 소리에 부 욱 북북 구름이 몰려오고 깨 갱 깽깽 천둥소리에 자 아 장장 비가 내리면서 네 가락은 한마음으로 대동(大同)한다. 허공이 숨긴 뮤즈를 데려와 사물로 풀어내는 저 늠연한 신명의 혼맹이. ---------------------------------------------- 홍영..

홍영수 시 2023.04.07

홍영수의 동화/동그라미

난 시골에 살아요. 눈이 유난히 둥글어서 사람들은 날 동그라미라고 불러요. 천사의 눈도 둥글고 풀잎의 이슬방울도 나처럼 둥글어요. 바다 고래의 눈도, 풀밭을 뛰어노는 토끼 눈도 둥글지요. 동그랗고 둥글다는 것은 모나지 않아 부딪치지 않지요. 굴렁쇠처럼 잘 구를 수 있어 누구에게도 다가가 가지요. 각이 없어 쉽게 친구가 되어요. 그래서 학교와 동네의 세모, 네모 친구들과 함께 잘 어울려 놀아요. 오늘은 학교에서 청소하다 내 친구 초롱이와 말다툼을 했어요. 헤어지고 나오면서 학교 운동장의 펄럭이는 태극기를 쳐다보는데 그 안에 동그라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빨간색 파란색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집에 돌아와 무심코 아빠에게 물어봤어요. ‘아빠! 왜 태극기 안의 동그라미는 두 개로 갈라져 있어요?’ 그것은 깊은 뜻이 ..

땅끝 마을

꽃잠을 위해 벗어 놓은 새색시 치맛자락 같은 고운 해안가 안으로 굽은 선창가에서 비릿한 해풍을 담은 고무대야의 간재미가 벙긋벙긋하며 사자봉을 삼키고 있다. 오가는 여객선 뱃고동 소리에 잠든 전복이 깨어나 다시마로 입맛을 다시고 갈매기의 파닥거린 날갯짓에 깜짝 놀라 튀어 오른 물고기들의 시선들이 바닷가 솔방울의 짭조름한 눈짓과 마주할 때 뻘낙지는 수족관 유리 벽에 붙어 나그네의 발걸음을 빨아들인다. 동무 삼은 시린 파도의 속삭임과 바닷가 서어나무 고목에 옹이진 세월로 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한 갈두리(葛頭里)* 까치놀 한 모금 머금고 진한 보랏빛 칡꽃 향에 함뿍 젖은 칡 머리. *갈두리(葛頭里): 땅끝 마을의 지명. 일명, 칡 머리 ------------------------------------ 홍영수 시인..

홍영수 시 2023.03.31

도시 풍경

한겨울의 강물처럼 시린 얼굴들이 도심을 흐르고 있다 물고기는 무리 지어 이웃을 하고 새들은 떼를 지어 길을 찾는데 북적대며 걷는 저들의 표정엔 말 이음표 하나 없고 휘청 걸음에 말줄임표만 실려 있다. 카페의 유리창 밖 바람이 바람에 실려 날고 비가 비를 맞고 있는 풍경들 사이로 조울증 걸린 모습들이 내일을 잃어버린 듯 외롭게 외로움을 타고 있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소통이 없어서이다. 그곳이 언어의 사막이다. 안개는 안갯속에서 피어오르고 눈은 눈 위에 쌓이듯 언어는 언어끼리 소통해야 하는데 회색빛 언어의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

홍영수 시 2023.03.29

우리의 소리, 恨 속의 興

필자의 고향이 남도 지역이어서 판소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어떤 공연이나 특히 회갑연 때는 남도 잡가나 판소리 단가 등을 많이 듣게 되는데, 옆지기 또한, 판소리를 취미 삼아 활동하기에 함께 공연 다니기도 한다. 판소리 기원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마을에서 큰 굿을 하면서 벌이는 판놀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또한 이러한 놀이 형태에서 소리 광대가 소리와 만담, 재담, 몸짓 등을 하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시대는 조선 전기에도 불렸을 것으로 보는데 자료가 없다. 그렇다면, 문헌이 남아있는 조선 영조 시대부터 봐야 할 것이다. 판소리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어 왔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의 구례, 순창 등에서 불리는 동편제는 웅장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