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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진실하다

어느 날 지인과의 만남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몸은 진실하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체험’을 했다. “직접 몸으로 체득하는 체험적 요소에서 우러나온 글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얘기 중에 나온 말이었던 것 같다. 특히 필자는 책을 읽는 도중에 무릎이나 머리를 가볍게 치면서 ‘아~하’라고 나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뱉을 때가 가끔 있다. 참고로 이 글에서의 ‘몸’은 ‘육체, 신체’를 뜻한다. 인간은 노동을 한다. ‘호모 라보란스다 (Homo laborans)’다. 이 말은 삶을 위해 일하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근본이고 그러한 육체적 노동의 행위는 그 어떤 종류의 노동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몸을 활용한 노동 즉, 농사짓는 일이나 건설 현장, 공사장 등에서의 노동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며 신성하..

내가 없다/홍영수

그 어떤 형상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생각이 생각 속으로 숨어들고 풍경이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아집이 떠난 자리에 환한 빛이 번뜩이고 무엇 하나 걸치지 않고 티끌의 욕심마저 날려 버리니 텅 비었다, 하늘이 티 없이 맑다, 마음이 언어마저도 언어 밖으로 내 던지면서 가름을 가르고 치우침을 치우니 중심이 사라지고 주변도 자취를 감춘다. 몸과 마음에 걸친 헛껍데기의 상(像)과 눈에 비치는 현상들은 자신의 마음이 빚는 것이다.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스스로 깨어나고 먹구름 사이로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구속되고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햇빛이 된다. 욕망이 욕망하는 것을 멈추고 분별지를 제거하니 눈앞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며 꽹한 시냇물처럼 맑고 맑다, 깨어난 마음이 ------------------------..

나의 시 2023.07.02

할머니의 봄날/홍영수

워따메 뭔놈의 꽃이 저렇게도 피었당가. 징상스럽게도 피었네잉. 봄이 오기는 왔는갑는디 꽃구경 한번 갈라고 해도 그놈의 일이 오살나게 많아서 못 간당께. 환장하고 미쳐불것어. 육남매 키워서 여워 놓고 좀 편할라고항께, 영감은 죽어뿔고, 이 큰집에서 혼자 있을랑께 객지 나간 자식 손주 생각 땜시 무담시 눈물만 나고. 암도 없는 방에서 혼자 밥먹을랑께 목구멍에 넘어가는둥 마는둥하고, 육시랄 놈의 쥐새끼만 염병하게 찍찍거리네. 아이구 나도 빨리 디져야한디 아직은 좀 머시기 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캭 죽어뿌렀으면 좋것는디, 그것도 맘대로 안되것지라우. 오지도 않는 새끼들 혹시나 해서 저 모퉁아리 보고 있는디, 쩌 먼 바다는 머한디 삘간물을 찌크러놓고 있다냐.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이구야 이놈의 내..

나의 시 2023.07.01

비움, 그 장엄한 희열

장자 철학의 핵심은 ‘비움(虛)’이라 할 수 있다. ‘심재心齋’란 실재처럼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심재를 통해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비움’이다. 심재를 실천하게 되면 일상적인 의식 속의 작은 나(self), 즉 小我는 사라지고 새로운 커다란 나(self) 즉, 大我로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왜냐면, 가족과 더 나아가 직장,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온통 비우고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심재를 하게 되면 텅 빈 방에 빛이 뿜어진다는 것이다(虛室生白).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면 왜곡된 세계가 보이지 않고, 자기만의 관점으로 보는 세계관도 없어질 것이다. 장자의 수양법인 심재좌망(心齋坐忘), 가만..

여행, 잠든 동사(動詞)의 고삐를 잡아당기자.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서 눈앞에 나타난 현상, 그 자연의 현상인 풍광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한다. 내가 바라보기 때문에 풍경이 다가오는 게 아니라 낯선 자의 시선과 발걸음에 풍경이 스스로 다가와 자신에 대한 모든 것들을 나에게 전해주는 느낌이다. 얼마 전 강원도 양양지방의 폐사지 두 곳을 답사했다. 바라던 대로 두 곳 모두 답사객, 여행객 한 명 없어서 좋았고, 필자 또한 혼자여서 더욱 좋았다. 텅 비어서 휑한 느낌마저 들고, 오히려 스산한 듯한 분위기에 서 있는 석탑과 흩어진 와편들에 감정을 이입해 교감하면서 천 년의 숨소리와 전혀 녹슬지 않고 어눌하지도 않은 그들만의 언어로 무언의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천 년 전의 시간의 품으로 들어갔다. 기억의 사원, 지금은 폐사지로 잠든 시간의 땅이다. 난 그 역사..

꿈속 어머니/홍영수

꿈속, 바스락거림이 적막한 귓전에 들린다. 설움과 보고픔에 지친 나에게 아스라이 보일 듯 말 듯 오신 어머니 나는 느낍니다. 방황의 마음을 다잡아 주신 침묵의 언어를 사루어 더더욱 따스한 손가락 마디마디의 정을 나의 심장에 찍힌 발자국의 의미를. 고울 사 고운 치맛자락 다소 곳 여미고 굽은 등 더욱 굽으시며 말 잊은 듯 정지문을 여신 무표정의 어머니 나는 마십니다. 첫새벽 장독대에 올린 기도의 정화수를 여명의 햇귀로 씻는 쌀뜨물을 가마솥 부뚜막에 흘러내린 뜨거운 밥물을. 어둠 속에서도 빛난 눈빛으로 순간의 나를 깨우고 일순간 흔적을 감추신 어머니 나는 기다립니다. 그리움이 곪아 터져 사모의 꽃을 피우는 순간을 나의 꿈이 어머니의 눈망울에 맺혀 빛나는 시간을 살아감이 당신 속에 있고 당신으로 넘치는 나의 ..

나의 시 2023.06.14

차이/홍영수

'경주 양동마을' 사진/홍영수. 2011. 제2회 고성디카시 공모전 수상작. 농익어 고개 숙인 자와 설익어 고개 든 자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

나의 시 2023.06.12

노마드(nomade)적 視線

필자의 서재는 넓지도 좁지도 않다. 책상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는 수시로 만져야 할 책이고, 그 외의 책들은 십진분류법이 아닌 나만의 분류법으로 언제든 손쉽게 찾도록 책장에 꽂혀 있다. 그리고 한 편에는 질서 없이 눕거나, 비스듬히, 때론 구겨지고 찢어진 표지 위에 쌓인 먼지를 머금고 흩어져 잠들어 있으면서 언제든 깨워 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말을 건네며 대화하고, 노래 부르고, 건물을 짓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책꽂이는 같은 책끼리 꽂혀 유유상종하고 바로 곁에는 또 다른 종류의 책들이 있다. 이렇듯 다른 사고와 이념을 가지고 이웃하며, 같은 책장에서 類類相從(유유상종)하면서 異類相從(이류상종)을 하고 있다. 저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가락은 또 다른 생각의..

둠벙/홍영수

산골 다랭이논 귀퉁이 작은 생명의 시작과 끝이 울타리 없이 모둠살이 한다. 올망졸망한 맥박과 심장들이 이웃으로 살아가는 둠벙 그 곁 논두렁 버들가지에 날아든 산새 한 마리의 매서운 시선에 자물자물한 풍뎅이 물풀에 숨어들고 개구리는 속도위반으로 물속으로 잠긴다. 욜랑욜랑한 토하(土蝦)의 발길질에 간지럼 타며 일렁이는 물비늘은 잠시 들른 한 점 구름을 지운다. 외진 모퉁이의 웅덩이는 열고, 닫고 가둠과 비움으로 둥글둥글 베풀며 산골의 생명을 키워낸다. 은밀한 방언 같은 둠벙의 현주소는 자그마한 생명들의 젖샘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

나의 시 202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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