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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향헌(餘香軒)의 뜰 / 홍영수

너에게 다가서면 너는 보이지 않고 돌아서면 살며시 풍겨오는 향기로운 너 네가 향기가 되고 향기가 내가 되어 알몸 맨살 버무려 실카장 껴안고서 앙가슴 풀어헤치고 통정하듯 스미고 싶은 곳. 뜰을 비질해도 향기는 쓸어내지 못하고 꽃이 없어도 지순한 벌 나비가 찾아드는 티 없는 영혼이 노를 젓고 생각이 헤엄치는 곳. 아! 금사리에는 해종일 향기의 파도가 일렁이고 취한 여향헌 조각배는 윤슬에 사운거리며 한 잔의 향을 마시고 싶은 뒷산 봉우리가 뜰앞 선착장을 바라보며 타는 갈증 달래는 곳. 적요가 적요롭게 드러누운 뜰의 허리춤에서 시향의 언어가 향불로 피어오를 때 보이지 않는 너의 숨결은 상처의 영혼을 감싸고 소리 없는 속삭임은 멍든 심신을 어루만진다. 아! 금모래의 꽃 향으로 허공에 피어올라 혼의 불빛으로 흩날리..

고평역(驛) 가는 길 / 황주현

도망쳐 온 곳 치고는 적당히 안전했다 사시사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강을 따라 내려가던 철길이 물이 불어 잠깐 멈칫하는 곳 슬레이트 지붕이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을 흉내 내어 코스모스들이 철로 변에서 연애하는 곳 빗물 고인 길바닥을 돌아 햇볕도 비켜 가는 곳 나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녹슨 철길처럼 길게 누워 여름을 보냈다 기차를 타고 싶지 않았으므로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고평 2리 마을회관 담벼락 아래 기적소리가 괭이밥 풀꽃의 목을 끊었다 빨랫줄은 자주 젖어 있었고 마를 새도 없이 저녁이 왔다 때로 역 대합실이 심심할 것 같아 으아, 하고 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 혼자 아프고, 아프다고 나 혼자 작아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빈집의 서까래 아래서 젖은 생각을 말리는 밤 강 ..

노을빛 시간 / 홍영수

노을빛에 한 뼘 한 걸음씩 이울어가는 저문 삶이 걷고 있다 수평선 끝자락에 매달린 해조음을 듣고 해독할 수 없는 파도의 문장을 넘기면서 돋보기 너머로 까치놀의 문맥을 훑어본다. 어른거린 눈은 놀 빛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농익은 침묵으로 망각의 시간을 반추하고 지나온 긴 시간의 발자국을 톺아보면서 평생의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가루진 노을 속 고뇌에 찬 오후의 생이 황혼빛 속으로 가뭇없이 흔적을 지우고 있다. 토혈한 저녁놀을 헐거운 소맷자락에 걸치고 몇 방울 남은 젊음을 삼키면서 해변을 쓸쓸히 걷는 늙마의 머리 위로 철새들이 羽羽羽 날며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한 오라기 해거름 길 위를 닳고 닳은 저녁놀 비켜 신고 하늘과 땅 사이 밟고 밟다 남은 이승의 길을 걷고 있다. ----------------..

홍영수 시 2023.10.16

창조, 자기만의 텍스트를 만들자.

https://www.cosmiannews.com/news/245026 [홍영수 칼럼] 창조, 자기만의 텍스트를 만들자 - 코스미안뉴스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며 동네 앞 저수지에서 자주 멱감았다. 그 저수지는 여러 산골짜기와 시냇물이 모여들어 다양한 어류와 수생식물들을 키우면서 아랫녘 벌판 농작물의 생명과 같은 물을www.cosmiannews.com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며 동네 앞 저수지에서 자주 멱감았다. 그 저수지는 여러 산골짜기와 시냇물이 모여들어 다양한 어류와 수생식물들을 키우면서 아랫녘 벌판 농작물의 생명과 같은 물을 공급한다. 그렇게 사방에서 흘러들어와 모인 곳인 저수지는 뭇 생명들의 종합 영양제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 또한 다양하고, 새롭고 창의적인 저수지에서 지식과 정보를 흡입하고 섭..

낮추니 / 홍영수

담을 낮추니 갇힌 세상이 슬금슬금 나가고 열린 세상이 살금살금 다가온다. 보이지 않는 밖의 풍경이 보이고 내 안의 풍경이 밖에서 보인다. 자세를 낮추니 작고 낮은 것들이 눈망울에 맺히고 크고 높은 것들이 눈 밖에 매달린다. 차별을 지우니 편견이 없고 다름을 건너니 시비가 없다. 내 안의 울타리를 밀치고 마음의 문을 여니 내 안에 네가 들어오고 네 안에 내가 들어간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

홍영수 시 2023.10.07

시의 밭/홍영수

https://blog.naver.com/deulgoosan/223225691562 시의 밭 / 홍영수 시의 밭 홍영수 아내는 묵정밭을 일구어 시심을 뿌려 놓았다 햇볕 머금은 열매에서 시상을 따고 빗소리를 ... blog.naver.com 시의 밭 아내는 묵정밭을 일구어 시심을 뿌려 놓았다. 햇볕 머금은 열매에서 시상을 따고 빗소리를 끌어안은 뿌리에서 주제를 캔다. 허술한 밭두둑의 행은 호미로 북돋우고 철 지나 시든 곁가지의 시구와 누렇게 된 잎의 시어는 잘라버리면서 불필요한 수식어는 꽃잎일지라도 따낸다. 벌레들이 잎사귀에 뚫어 놓은 자음의 구멍과 새들이 꽃다지에 쪼아놓은 모음의 흠집들은 떼 내고 다듬으면서 시 밭에 자란 문장을 다듬는다. 떨어뜨린 밭작물의 행간에서 의미를 다잡으며 참신한 시어와 새로운 ..

꿈속의 어머니 / 홍영수

꿈속, 바스락거림이 적막한 귓전에 들린다. 설움과 보고픔에 지친 나에게 아스라이, 보일 듯 말 듯 오신 어머니! 나는 느낍니다. 슬픈 방황의 마음을 다잡아 주신 침묵의 언어를 사루어 더더욱 따스한 손가락 마디마디의 정을 나의 심장에 찍힌 발자국의 의미를 고울사 고운 치맛자락 다소 곳 여미고 굽은 등 더욱 낮추시며 말을 잊은 듯, 정지문을 여신 무표정의 어머니! 나는 마십니다. 어둑새벽, 물 길어 장독대에 올린 정화수의 기도를 햇귀를 허리에 동여매고 정성껏 씻는 쌀뜨물을 아궁이 불 지피며 연기에 흘리는 사랑의 눈물을 번뜩이는 한순간의 모습으로 어둠 속에도 빛난 눈빛으로 순간의 나를 깨우고 일순간 흔적을 감추신 어머니! 나는 기다립니다. 그리움이 곪아 터져 사모의 꽃을 피우는 순간을 나의 꿈이 어머니의 눈망..

홍영수 시 2023.09.30

부천 제3회 전국시낭송대회 시니어부 은상 이봉숙

https://www.youtube.com/watch?v=xyeymtHXyvk 당신의 빈자리 / 홍영수 냉기를 머금은 침대 하나 하얀 시트 위에 적막함이 누워있다. 깊게 파인 육순의 자국 위에 귀를 기울이니 떠나지 못한 당신의 심장 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듯 창문 틈새로, 바람을 안고 들어온 차가운 체온이 침대 위에 눕는다. 온기 없는 온기가 따스하다. 숨소리 잃은 베개를 당겨 안으니 한숨에 실린 베갯잇이 긴 한숨을 짓고 메말랐던 눈물 자국이 촉촉한 눈물을 흘린다. 한 생이 저물기 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이제야 당신의 고단했던 삶의 한 자락을 휘감으니 따스한 그림자로 가만히 다가와 타오른 그리움의 내 가슴을 감싸준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움푹 들어간 베갯속의 허전함을 아직도 세탁하지 않은 침대보에 스며..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반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상대를 배척, 폄하, 격퇴 시키려고 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이렇게 서로 밀어내며 관계하지 않으려는 가치 전도에서 우린 과연 그 어떤 타협과 협치를 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당쟁과 사화士禍를 보면 삼족을 멸하고, 유배 보내고 숱한 백성들은 피로 물들고 피폐해져 갔다. 동인은 서인을, 서인은 남인을 죽이면서 대북, 소북 등의 끊임없는 살육이 자행되었다. 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귀양, 유배 보냈다. 오죽했으면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고 했겠는가. 이러한 일이 왕권과 관계를 맺었기에 일어났다고 할 때, 과연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면 괜찮다는 것인가? 특히 사회적 지위에 있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