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시인 58

연암의 까마귀 날개에서 모네의 빛을 만나다.

출근길, 전철역에 하차해 계단을 오르면 길냥이의 쉼터가 있다. 누군가 빈 양푼에 먹이를 가득 채워 놓는데 고양이가 없을 때는 주위의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 먹이를 훔친다. 훔치기 전 소공원의 광장에 모인 일백여 마리의 비둘기들을 어느 날, 출근길 아침에 살펴보았다. 그날은 유난히 비둘기 날개 빛이 반짝거릴 때와 움직일 때, 그리고 보는 방향에 따라 빛이 다른 것이다. 순간, 집에 가서 책장의 을 다시 꺼내 읽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모네를 떠올리며 그 장소를 떠났다. 몇 년 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5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모네, 빛을 그리다”의 전시회를 갔었다. 이 전시회는 일반적인 그림 전시와는 다르게 컨버전스 아트(convergence art), 즉 디지털 기술과 그림이 만나서 한 편..

어머니의 읊조림 속 樂과 恨

뭔가 규정할 수 없는 음악, 문학, 그림 등이 좋을 때가 있다. 어디서 본 듯, 들은 듯, 읽은 듯한데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두물머리 근처의 수종사 아래에서 만난 강변의 몽환적인 濃霧(농무) 속, 눈에 드는 건 꿈속 같은 풍경과 몸으로 느끼는 건 미립자의 촉촉한 느낌, 이렇게 규정할 수 없는 비규정적인 무엇에서 그 너머의 무엇으로 나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필자의 고향 산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0년대 초이다. 그 이전엔 나무 등잔에 석유를 담아 불을 켜는 호롱을 매달아 어둠을 밝혔다. 낮에는 힘든 농사일을 하시고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침을 묻힌 실을 바늘귀에 꿰어 헐고 찢긴 옷들을 밤늦도록 꿰매셨다. 그때 어머니는 호롱불 아래서 노랫말이 없는 비음..

짝짝이 신발을 신고 물구나무를 서보자

어린 딸(당시 3살)은 짝짝이 신발만 신었다. 짝짝이 신발이 아니면 동갑내기 언니 신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겨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겨 다녔다. 어느 날 동네 슈퍼를 가는데 짝짝이 신발의 딸을 보더니, 중년의 남성분이 “지금은 신발이 그렇게 나와요?”라고 물었다. 어쩌다 만취한 상태에서 친구의 신발과 바꿔 신을 수 있는 세대, 중년의 삶에서는 보지도 못하고 있을 수 없는 현실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틀에 갇히고 굳어져 중층적으로 두꺼워진 사고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 당시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칠 때가 있다. 변화 없는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뭔지 모르게 누름돌에 억눌린 듯한 감정을 느낄 때 특히 그렇다. 얼마나 독특하고..

미네르바의 老人은 황혼 녘에 巨人의 날개를 편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는 철학자 헤겔의 저서 서문에 나온 말이다. 진리탐구나 철학은 어떤 사건에 선행하는 게 아니라 시행착오와 수많은 지혜를 갈고 닦음 끝에 비로소 늦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부엉이는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다. 서양에서는 지혜의 상징이기도 하다. 즉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는 해 질 녘에 활동하듯 지혜도 모든 일이 끝날 무렵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인간 또한 황혼이 깃들 무렵에 비로소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의 여행이 좋다. 왜냐면 풍성한 나뭇잎들의 웅성거림도 좋지만, 잎새를 떨궈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의 기하학적 문양과 빈 가지 끝의 진양조장단의 홀로된 읊조림이 좋아서이다. 어느 해 늦가을, 지리산 둘레길을 아내와 함께 걸었다. 남원의 매봉마을에서..

조선 후기 최고의 연예인 바우덕이

한겨울 중턱에 안성의 산사를 찾았다. 엄동설한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느긋한 마음으로 넓은 경내를 살피면서 지금은 사라진 요사채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호젓한 사찰의 마당에 서서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바우덕이를 생각한다. 동가숙 서가식 하며 떠돌아야만 했던 그들, 이곳에서 받은 신표(信標)를 들고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안성 장터는 물론 전국을 무대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 바로 청룡사이다. 그들이 지금처럼 추운 겨울에는 연희를 하지 못해 이곳으로 돌아와 출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공연을 위해 부족한 기예를 익히고 따뜻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렇듯 삶이 배고프고 고달팠던 그들의 사연들이 맴돌고 숨 쉬었던 성지가 바로 이곳 청룡사이다. 곳곳에 베인 사찰의..

소쇄원(瀟灑園), 沈黙없이 침묵하는 음악을 듣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음악을 떠올린다 그의 음악은 선율의 아름다움이나 심금을 울린 음악도 아니고 가슴을 파고드는 울림의 멜로디도 아니다. 주변의 소음과 일상적인 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틀에 갇힌 감옥에서 탈출한‘반예술(anti-art)의 음악이라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소위 우연성의 음악을 추구했던 음악가이다. 이러한 음악에 영향을 준 것은 인도 철학자 사라브하이(Gita Sarabhai, 1922-2011)이다. 인도의 음악과 철학을 배우면서 동양의 禪사상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술과 문학은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양의 음악 세계는 7음계의 음표 체계에 안에 갇혀있다. 이러한 체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 존 케이지의 우연성의 음악이다. 소쇄원 정..

멍 때리는 생각에 따귀를 때려라

어느 날, 남한강변을 지나가다 우연히‘사각하늘’이라는 카페의 이름이 눈에 띄어 호기심에 쉬어갈 겸, 그곳에 차를 멈췄다. 왜‘사각하늘’일까 라는 궁금증이 발동해서 카페 쥔장께 물었더니 말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을 올려다보니 지붕 한가운데가 사각형으로 되어있었다. 하늘이 사각으로 보였다. 순간, 골수를 치고 들어오는 뭔가에 깜짝 놀라 다시 한번 쳐다봐도 사각 하늘이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배웠는데(天圓地方) 말이다. 그리고 따라 놓은 물컵의 물을 마시며 창문 밖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고개 들어 다시 한번 하늘을 보는데 여전히 사각의 틀 속엔 둥근 하늘이 아닌 사각의 하늘이었다. 잠시 눈을 돌려 컵 안의 물을 바라본다. 물은 잠든 듯 고요하고 정적이 정적을 안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 ..

희생하는 자의 마지막 언어는 침묵이다.

뿌리가 뽑힐 것 같은 태풍을 안고 살아야 하는 바닷가에, 염분을 머금은 소나무 한 그루. 죽음의 가지 끝에 수많은 솔방울을 매달고 있다. 절망의 끝에 선 몸부림으로 주렁주렁 매단 방울들. 희망 없는 예감이 들 때 생명력은 더욱 강해지는 것일까, 자기 죽음을 예고하듯 저토록 많이 매달고 있기까지 침묵의 고통은 상처 난 곳에 스며든 바닷물처럼 쓰라렸으리라. 가지가 찢길 듯 많은 방울을 매달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기에 더 많이 매달아야 하는 슬픈 생존의 역설이다. 지금도 잿빛 주검의 침묵으로 서 있다. 바로 곁에는 갓 자란 소나무 한그루 하느작거린다. (어불도(於佛島) 바닷가에서 본 풍경) 가끔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꾼다. 생소하고 이색적인 풍경이 다소 두렵기도 하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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