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시인 58

한때는/홍영수

터질 듯, 탄탄한 몸매와 매끄러운 피부 풀어헤치면 안 된다는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꽉 조여진 둥그런 꼭지 간밤 힘껏 돌려 풀고 시원하게 한바탕 꿀꺽꿀꺽 타는 갈증 해소한 뒤 쓰레기통에 내팽개친 쭈그러진 페트병 이른 아침 출근길 분리수거함 앞에 허리 구부리고 있는 옆지기 헐거워진 옷 사이로 쳐진 두…… 한때는.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나의 시 2023.01.05

흔적의 꽃/홍영수

장독처럼 불룩 내민 배 중심축의 배꼽에서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실핏줄 같은 흔적들이 고고呱呱의 울림을 기억하고 있다. 사이사이 갈라진 실금은 잉태의 시점으로 향하고 양수의 물기를 머금은 뱃살이 살꽃으로 피어날 때 튼 살결은 꽃잎이 된다. 긴장감 잃은 아랫배가 품었던 열 달을 비우니 출렁이는 뱃살엔 꽃이 피고 한생의 시작을 머금은 흔적의 살갗엔 생명이 남기고 간 자국들이 송이송이 피어 있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

나의 시 2022.12.27

정한수/홍영수

새벽을 타고 문지방을 넘는다. 행여 들키면 안 되는 듯 잠든 문고리를 잡고 정지문을 연다. 부뚜막 곁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어둑새벽의 이슬을 밟고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다. 고요한 뒤란의 장독대 위에 신줏단지 모시듯 흰 대접 하나 올려놓는다. 새벽길 떠난 남편보다 먼저 길 열고 부정을 털어버리려는 듯 옷매무새 다잡으며 두 손 모은다. 버리고 비워서 헐렁해진 몸 허리 굽혀 천지신명께 빌고 허리 펴며 하늘과 소통하며 목젖에 걸린 자식들 위해 여자라는 것조차 잊는다. 아니, 처음부터 어머니였을까. 소리 없는 큰 울림의 기도 한 그릇 성역이고 종교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

나의 시 2022.12.24

오늘 하루 십리다/홍영수

‘오늘 하루 십리다’ 길옆 식당 유리창에 붙여놓은 글이다. 하루‘쉽니다’의 날인데‘십리다’이다. 하루하루가 십리 길을 걷는 삶이기에 그 길의 압박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흰 종이 한 장에 써 놓았다 비단, 오늘뿐만 아니었기에 주인의 맘을 헤아리는 계산대의 볼펜이 스스로, 아니 저절로 쓴 것이다. 어찌, 십 리 길처럼 걷는 쉼이 쉼이겠는가 같은 듯 다른 듯, 다른 듯 같은 듯 ‘십리다가 쉽니다’이고 ‘쉽니다가 십리다’이다. 불이不二의 삶을 헤아리는 주인은 ‘오늘 하루 십리다’라고 써 놓고 ‘오늘 하루 쉽리다’라고 읽고 싶은 것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

나의 시 2022.12.16

동백꽃/홍영수

핏빛 한 웅큼 툭 떨어진다. 심장 덩어리 하나 서녘 노을에 짙게 물들며 때가 되어 지구 위로 낙하하는 저 숭고한 찰나의 긴 별리. ‘동백꽃’의 꽃말을 열정적 사랑(붉은 동백) 혹은 비밀스런 사랑(흰 동백)이라 하는데 그보다는 ‘깨끗한 죽음’이란 의미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다른 꽃과 달리 ‘동백꽃’은 꽃봉오리 채로 어느 순간 툭하고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꽃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그 흔적도 찾기 힘들다. 멀쩡하게 잘 피어 있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져버리는 동백 — 그래서 노인들 방에 ‘동백꽃’ 화분을 두지 말라고 한다. 동백꽃이 질 때, 바로 꽃봉오리 통째로 어느 순간 툭 떨어질 때 노인네들은 가슴까지 철렁 내려앉는단다. 홍영수의 시 에는 ‘동백꽃’의 그런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

나의 시 2022.12.10

종로에 핀 녹두꽃*/홍영수

바람이 분다 하늘에서 인간에게 불어온다. 종로 네거리 상투 머리가 영혼이 흔들린 고부 농민에게 목청껏 울부짖으며 죽창과 농기구 들고 올라오란다 전옥서(典獄署)의 컴컴한 적굴에서 교수형으로 쏟았던 붉은 피로 동학의 바람을 휘어잡고 깊게 새겨야 할 역사의 서사를 종로 바닥에 일필휘지로 쓰며 서 있는 지금의 자리를 똑바로 보란다. 서울 한복판, 저 부릅뜬 두 눈은 탐욕의 부피를 부러워하지 말고 허상의 명예를 의심하라 하면서 비록 기울어진 운동장일지언정 우금치의 말발굽 소리로 일깨우란다. 함성의 바람이 분다 황토현 갑오의 바람으로 분다 주절주절 내리는 을미의 봄비에 사라지면서도 피어난 녹두 꽃잎 하늘하늘 길 위에 휘날린다. *종로 4거리에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

나의 시 2022.12.08

독락(獨樂)의 공간/홍영수

병산서원 머슴의 뒷간은 스스로 그러하다. 문이 없다. 산천 어디에 문이 있었던가. 문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헛기침은 한 번이면 족하다. 덤으로 한 번 더 해도 된다. 없는 문 여는 것에 대한 예의다. 자연은 품이 넓지 않은가. 지붕은 지붕 위로 날아가고 없다 강산은 처음부터 열린 공간이었다. 환기창도 없다. 태초부터 자연은 청정했다. 그래서 환기할 게 없어 없다. 가끔, 강 건너 병풍산이 들락거릴 뿐. 머슴의 뒷간, 통시(便所)는 홀로 즐기는 공간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

나의 시 2022.12.04

복사꽃/홍영수

눈으로 당기면 고즈넉이 다가온 향 사르르 코끝을 스치고 고울사 고운 꽃잎 윤슬에 아롱지며 눈부시어라.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지하철 7호선 신중동역에 게재된 시

나의 시 2022.12.03

갈대밭/홍영수

저 하이얀 웃음들 비워서 가벼운 것들의 하늘거림 갈바람 줄을 켜면 생각은 마음 따라 일어나고 바람 따라 달려가는 신명 나는 또래들의 티 없이 넉넉한 싱싱한 놀이판을 보라. 수렁 이랑에 푸른 몸 올올 세우고 파도 소리와 바람결에 흔들리고 일렁이는 은빛 조각들의 어울림 미틈달 어슬녘, 활짝 핀 같대 꽃밭에 노을이 슬며시 둥지를 틀고 지친 철새들이 깃을 내릴 때 잠시 호흡을 고른 갯벌의 게들 얼마나 아름다운 빈 가슴들의 너나들인가. 파도의 들숨 날숨에 소금기 머금은 가냘픈 몸짓 오가는 이 눈길 담으려 하지 않는 외딴 바닷가 간들바람에 새살거리는 가녀린 잎들 텅 빈 관절 마디로 공명하는 한 울림의 자유.

나의 시 2022.11.27

구멍/구정혜

썰물이 나간 사이 갯벌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다 작은 게 한 마리 찰진 흙 온몸에 뒤집어쓰고 구멍을 파고 있다 산다는 것은 구멍을 내는 일 구멍만큼이나 자기 세상이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완벽을 노력했지만 내 마음 뒤집어 보면 곳곳에 구멍 투성이다. 그곳으로 바람도 들어오고 햇볕도 파고들고 친구도 왔다 간다 더러는 달도 제 짝인 듯 넌지시 맞춰 보는 _ 芝堂 구정혜 시인 -------------------------- 필자는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이유는 없다. 다만, 북적거리는 여름 해변보다는 한적해서 홀로 걸으며 썰물 때 드러난 갯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날아든 조류들, ‘드러냄과 들어옴’의 드나듦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시인은 썰물의 갯벌에서 게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작은 집게발로..

나의 시 평론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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