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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선 물소리 배차 시간표/황주현

물소리에도 정각이 있습니다 정오의 햇살은 물 도리에서 가끔 물의 보폭을 맞추느라 연착할 때 있습니다 온갖 지류에서 탑승한 물 색깔들은 쉼 없이 덜컹거립니다 덜컹거린다는 것, 그건 물이 달린다는 뜻입니다 속도를 조절하는 물의 바퀴가 있다는 뜻입니다 샛강 속도로 달리는 이 완행, 그래서 늘 적자랍니다 때론 어느 집 마당 옆을 민망하게 지나치기도 하고 군불을 때는 저녁연기나 애호박 달린 호박 줄기와 잠깐 그 속도를 다투기도 하지만 완행은 저의 소리를 세면서 달립니다 한때는 나름 근사치의 시계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완행이 지나가면 마을은 아침상을 차리기도 하고 저녁상을 물리기도 했었습니다 학교 종소리보다 먼저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부르곤 했었습니다 용궁역 지나 큰 바위에 직선을 양보하고 옥산역 비탈진 경사면에..

나의 글 外 2023.11.01

반대의 일치(反對-一致), 그 진리의 터득함.

곡즉전曲則全, “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온전 하려면, 구부려지거나 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냇가의 버드나무를 보자. 바람이 불면 휘어진다. 태풍이 불어오면 더욱 휘어진다. 휘고 굽지 않으면 결국 가지가 끊어지거나 아니면,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이것은 유연한 사고와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휨’이 곧 ‘폄’이고, ‘폄’이 곧 ‘휨’이다. ‘곧음’이 ‘굽음’이고 ‘굽음’이 ‘곧음’이다.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상생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처럼 ‘반대의 일치(反對-一致’라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 삶의 현실이다. 어느 한 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라는 생각으로 의연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을 오직 자기의 시선으로 ..

누군가의 세상 속에서 ‘나’를 발견하자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때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분별하고 가치를 지향한다. 특히 창의력에 목숨을 건 문학,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관찰과 주의 깊은 시선이 필요하다. 그 어떤 예술 분야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보다는,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움직이는 현장성과 현실감에서 보고 느낄 때 시와 음악이 흐르고 그림이 보인다. 온통 세속적인 욕망과 욕심으로 가득 찬 이기적 사고에는 좋은 작품이 뿌리내릴 수 없다. 건설 현장 막일꾼의 옷에 적신 땀과 하얗게 맺힌 작업복의 소금기 배인 몸과 옷에서는 시와 서사가 흐르지만, 직접 부딪치지 않고 오직 지시만 하면서 작업의 성과만을 위해 욕심과 욕망으로 업적을 이루려는 그러한 사람에게는 결코 시도 서사도 없다. 서사와 시를 만나려..

여향헌(餘香軒)의 뜰 / 홍영수

너에게 다가서면 너는 보이지 않고 돌아서면 살며시 풍겨오는 향기로운 너 네가 향기가 되고 향기가 내가 되어 알몸 맨살 버무려 실카장 껴안고서 앙가슴 풀어헤치고 통정하듯 스미고 싶은 곳. 뜰을 비질해도 향기는 쓸어내지 못하고 꽃이 없어도 지순한 벌 나비가 찾아드는 티 없는 영혼이 노를 젓고 생각이 헤엄치는 곳. 아! 금사리에는 해종일 향기의 파도가 일렁이고 취한 여향헌 조각배는 윤슬에 사운거리며 한 잔의 향을 마시고 싶은 뒷산 봉우리가 뜰앞 선착장을 바라보며 타는 갈증 달래는 곳. 적요가 적요롭게 드러누운 뜰의 허리춤에서 시향의 언어가 향불로 피어오를 때 보이지 않는 너의 숨결은 상처의 영혼을 감싸고 소리 없는 속삭임은 멍든 심신을 어루만진다. 아! 금모래의 꽃 향으로 허공에 피어올라 혼의 불빛으로 흩날리..

나의 글 外 2023.10.21

고평역(驛) 가는 길 / 황주현

도망쳐 온 곳 치고는 적당히 안전했다 사시사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강을 따라 내려가던 철길이 물이 불어 잠깐 멈칫하는 곳 슬레이트 지붕이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을 흉내 내어 코스모스들이 철로 변에서 연애하는 곳 빗물 고인 길바닥을 돌아 햇볕도 비켜 가는 곳 나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녹슨 철길처럼 길게 누워 여름을 보냈다 기차를 타고 싶지 않았으므로 기차가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고평 2리 마을회관 담벼락 아래 기적소리가 괭이밥 풀꽃의 목을 끊었다 빨랫줄은 자주 젖어 있었고 마를 새도 없이 저녁이 왔다 때로 역 대합실이 심심할 것 같아 으아, 하고 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 혼자 아프고, 아프다고 나 혼자 작아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빈집의 서까래 아래서 젖은 생각을 말리는 밤 강 ..

나의 글 外 2023.10.18

노을빛 시간 / 홍영수

노을빛에 한 뼘 한 걸음씩 이울어가는 저문 삶이 걷고 있다 수평선 끝자락에 매달린 해조음을 듣고 해독할 수 없는 파도의 문장을 넘기면서 돋보기 너머로 까치놀의 문맥을 훑어본다. 어른거린 눈은 놀 빛 글자를 읽을 수 없다. 농익은 침묵으로 망각의 시간을 반추하고 지나온 긴 시간의 발자국을 톺아보면서 평생의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가루진 노을 속 고뇌에 찬 오후의 생이 황혼빛 속으로 가뭇없이 흔적을 지우고 있다. 토혈한 저녁놀을 헐거운 소맷자락에 걸치고 몇 방울 남은 젊음을 삼키면서 해변을 쓸쓸히 걷는 늙마의 머리 위로 철새들이 羽羽羽 날며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한 오라기 해거름 길 위를 닳고 닳은 저녁놀 비켜 신고 하늘과 땅 사이 밟고 밟다 남은 이승의 길을 걷고 있다. ----------------..

나의 시 202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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