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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인생 수리 중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당시에는 교련복을 입고 조회를 하는데 모든 학년이 운동장에 모였다. 3학년 1반의 학급이 2열 종대로 뒷짐 지고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던 중, 직책 때문에 맨 앞에 홀로 서 있는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천천히 걸어오셨다. 무슨 일인지 자꾸 내 교모를 쳐다보시면서 한 바퀴 돌아서더니 갑자기 제 볼때기를 잡아당기셨다. 그 모든 후배와 동급의 학생들, 더구나 공학이어서 여고생도 있는 앞에서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웃으면서 조용히 ‘아! 선생님’이라고 하는 순간, “뭐, 이놈의 자슥아! 뭐가 고장 났다고? 니가 뭣이 고장 났어? 허허 또 수리까지 한다고야?” 하시면서 웃으시는 듯 약간의 화가 나시는 듯 나중에는 귀를 몇 번 잡아당기셨다. 솔직히 전교생 앞에..

예술가여!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자.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과 창의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예술가들은 그 어떤 권위와 명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만의 시각과 아이디어로 표현해야 하고 또한,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는 경험과 실험적인 창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통해 더욱 풍부하고 혁신적 가치관을 갖는 예술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권위와 명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자신의 목표와 가치관 등을 고려해서 예술을 창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며칠 전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만난 시흥시에서 활동하는 화가 한 분을 만났다. 낯선 분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표정과 행동에서 자유분방함을 보았다. 그를 옭아매는 틀과 고정관념을 과감히 부수고 벗어던지는 듯한 거침없는 예..

새금*다정자(塞琴茶亭子) / 홍영수

굼깊은 한듬절**의 독경 소리였을까 다향에 얼큰해진 무선舞仙들의 옷자락 여미는 소리였을까 흰 달빛이 고봉으로 내릴 무렵 자국걸음으로 마실 나온 일지암 초의 동다송을 꼴마리에 쑤셔 넣고 기스락 가녘으로 슬금슬금 내려오고 만덕산 자락, 초당의 다산은 차부뚝막에서 달인 약천의 찻물을 안고 깔끄막 우슬재를 싸목싸목 넘어와 다정자에 올라서는데 누군가 새팍 여는 소리 탐라의 세한도 소낭구 아래 홀로 외로운 추사가 아슴찮케 명선차 한 잔 가져온다. 멜겁시 원림에 앉아있던 고산이 뜽금없이 일어나 살금살금 다가올 때 눈엽을 솎은 람원藍園***, 첫물차를 짓는디 웨메! 차향에 취해분께 신선도 춤을 춰부네잉. *새금(塞琴) : 해남의 옛 지명 **한듬절 : 대흥사의 옛 명칭 ***람원藍園 : 새금다정자 주인의 호 시작 노트..

나의 시 2023.12.15

둘이 아닌, / 홍영수

너와 내가 없다면 네 것과 내 것도 없으니 이 세상은 미움도 사랑도 없을 것이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면 어떤 누구와 어느 神과도 하나이니 살아감에 시기도 질투도 없을 것이다. 가는 마음 멈추고 가진 생각 버리면 눈앞의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이고 삶과 죽음은 호흡 한 번 하는 순간일 뿐이니 욕망에 집착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생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니 내가 있다는 아상我相을 버리고 공空의 세계에서 내가 없음을 찾아 스스로 깨어나야 할 것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

나의 시 2023.12.10

하늘 다리 -중증 치매 요양원에서/박혜숙

한 걸음씩 다리를 절룩이며 하늘로 이어지는 빛의 다리를 놓고 있다 내 입김을 불어 넣은 그림자 가느다란 숨소리 따뜻하다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건 또 하나의 빛이 아닐까 너풀거리며 길 한가운데서 춤추는 당신 춤사위 아무 거리낌 없이 나를 실어 본다는 건 행인의 눈초리에 마음의 다리 뚝 끊긴다 아무것도 몰라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은 없는가 마음이 엇갈리는 길목에서 서성거리던 적은 없는가 하늘로 가는 마지막 다리 끝에 주저앉아 눈꺼풀이 내려 감긴 당신을 만진다, 쓰다듬는다 내 등을 밟혀 당신을 하늘에 올리고 싶다. 시집 「바람의 뼈」, 기픈구지, 2009. ---------------------------- 절간의 山門 앞에 서면 한 발짝 너머가 聖이고 한 발짝 이전은 俗이다. 어쩜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도 산..

나의 시 평론 2023.12.06

당신의 빈자리/홍영수, 낭송 /상선영

https://www.youtube.com/watch?v=-TCiTH8Vuko&t=203s 당신의 빈자리 냉기를 머금은 침대 하나 하얀 시트 위에 적막함이 누워있다. 깊게 파인 육순의 자국 위에 귀를 기울이니 떠나지 못한 당신의 심장 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듯 창문 틈새로, 바람을 안고 들어온 차가운 체온이 침대 위에 눕는다. 온기 없는 온기가 따스하다. 숨소리 잃은 베개를 당겨 안으니 한숨에 실린 베갯잇이 긴 한숨을 짓고 메말랐던 눈물 자국이 촉촉한 눈물을 흘린다. 한 생이 저물기 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이제야 당신의 고단했던 삶의 한 자락을 휘감으니 따스한 그림자로 가만히 다가와 타오른 그리움의 내 가슴을 감싸준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움푹 들어간 베갯속의 허전함을 아직도 세탁하지 않은 침대보에 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無用之用)의 Paradox

시골에는 대부분 동네 한가운데 아님, 다른 한편에 정자나무가 있다. 수령이 오래되어 수피는 울퉁불퉁하고, 올곧지도 못하고 수 없는 세월의 풍파에 가지가 꺾여 있기도 하다. 언뜻 보면 그 정자나무를 베어서 목가구나 집 짓는 대들보로 쓰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렇지만, 한여름에는 동네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유용有用하지 못할지라도 그 유용하지 못함 속 무용無用함으로 그늘과 놀이터가 되는 것에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뜻을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쓸모 있음(有用)’과 ‘쓸모없음(無用)’의 판단 기준이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쓸모 있게 사는가, 쓸모없게 사는가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 장자는 이러한 물음에 『莊子』 「人間世」편에서‘상수리나..

한겨울의 사마귀 / 홍영수

문설주의 돌쩌귀를 기억하는 시골 폐가에서 가져온 나무문짝 귀퉁이에 작은 움직임 있다. 어미를 기다릴까, 한겨울인데 십여 마리 새끼다. 탄생은 본능을 점지한 것일까 어미 닮은 자세이다 거실 온도가 알집의 알에 스며든, 따스함은 탄생의 비극을 낳고 계절의 착각임을 모른 채 어미를 봄 마중하듯 서로 엉켜 앞발을 비비며 들어 올린다. 앙글앙글한 모습들 어린 것들의 울부짖음일까? 아비의 사체를 삼킨 제의일까? 창밖으로 차마 보내지 못하고 베란다의 시든 꽃잎 위에 가만히 앉혔다. 다음 날 아침 자세히 살펴보니 움직임이 없이 없다. 아뿔싸! 올해 들어 첫 한파주의보란다 즘생같은 행동에 가슴 미어지며 내 심장도 동상 걸렸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

나의 시 202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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